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문단 편집) === 마디운 사태 === 한편 수카르노가 이끄는 독립파 세력은 1948년 말부터 미국의 외교적 지지를 획득했다. 원래 미국 정치권은 어느 정도 [[반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수카르노의 독립 투쟁을 동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948년 중순까지는 아직 수카르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며 일단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관망하는 입장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내지 공산 세력에 대한 수카르노의 입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는 친서방 자본주의 계열의 인도네시아 정권 수립, 차악은 네덜란드 식민제국의 유지, 최악은 인도네시아의 공산화였다. 만약 수카르노가 '친공산주의 성향'을 보인다면 미국은 수카르노 및 독립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향후 행보에는 수카르노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던 와중인 1948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수카르노의 무장 해제 요구에 반발해 마디운에서 마디운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일본과 미국의 노예'인 수카르노 및 하타 지도부에 대한 반란 사건, 일명 '''마디운 사태'''를 일으켰다. 공산당이 일본을 지목한 이유는 일본의 동인도 점령 시기에 수카르노는 일단 일본 점령군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으며 나중에 후회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동인도인 동원에 협력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수카르노는 항상 일본군에 기꺼이 협력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협력적이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 오자 일본은 동인도에 '독립 준비 위원회'(PPKI)를 설치했는데 수카르노는 이 위원회의 의장으로 위촉되었다. 수카르노는 미국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얻기 위해 공산당이 일으킨 이 반란을 확실하게 진압하고자 했다. 수카르노 일파는 12월 초까지 가혹하리만치 잔혹하게 처리했고 반란 주동자 무소(Musso)를 10월 31일에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본 미국 정부는 마침내 수카르노의 '''반공 의지를 확신'''하고 수카르노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적 지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 입장에서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최후의 수를 던져본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타이밍이 안 좋았다. 만약 조금만 더 버텼으면 2년 뒤 일어난 [[6.25 전쟁]]으로 더 이상 미국은 이쪽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공산당의 성급한 봉기가 없고 미국의 외교적 지지가 미진했다면 네덜란드와 독립파의 분쟁은 지지부진했을 가능성이 높고 [[베트남 전쟁]]이나 그 이상의 수렁에 빠졌을 확률이 높았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독립파의 전술적 열세를 외교적 우세로 뒤엎은 것이기 때문에 전개에 미국의 개입이 미친 영향이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